만약은 없다 리뷰 남궁인

만약은 없다 리뷰

만약은 없다 리뷰

군 시절 시골의사 박경철의 에세이를 본적이 있다. 일과가 끝나고 내무반에 들어와 혼자 읽는데 엄청난 몰입이 왔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를 묶은 책인데 소재가 자극적이었다. 의사 생활이 원래 그런건지도 모르겠다.  십몇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하는 내용은 할머니가 손자인 갓난아기를 끓는물에 끓였다는 것이었다. 치매 노인이었다.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남궁인이란 이름은 몇번 들어본적이 있다. 강서구 피씨방 살인 사건때 썼던 글을 본적이 있다. 문체가 비장하다. 글쓰는 이의 심성이 비관적이거나 나쁘게 말하면 멋을 좀 부린 느낌의 글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만약은 없다>는 응급 의사인 남궁인의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병원 에피소드로 가득한 책이다.

끔찍한 에피소드

박경철의 에세이를 읽을 떄와 비슷한 감각이 왔다. 그 중에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수면제로 자살을 시도한 중년의 남자가 깨어난 뒤 이제 정신과 치료도 잘 받겠다고 하고 두 시간 뒤에 투신 자살로 다시 응급실에 실려온 사연이 있다. 다른 이야기는  한번 내원했던 말기암 환자가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응급실에 교통사고로 죽음에 직면한 여자가 실려왔다. 이후 실려온 사람은 비교적 경상인 중년의 남자였는데 얼마전 내원했던 말기암 환자였다. 극심한 통증에 이제 병원에서 생을 마감하려 차를 몰던 도중 끔찍한 고통에 그만 교통사고를 내버린 것이었다.

비장한 운명론을 느끼다

읽다보면 반전을 기대하게 된다. 제발 이 환자가 살아나길. 하지만 독자가 희망하는 반전의 스토리는 없다.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산다. 매일밤 그가 돌보는 환자는 100여명이 넘었다. 죽어서 들어오는 사람, 살아서 나가는 사람, 살아서 나가지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 수많은 사연이 있다. 어떤 대목은 의사가 히어로 무비의 캐릭터 같이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한 의사가 짊어지는 짐은 만만치가 않았다.

바쁜 하루 까칠한 의사에 대한 공감

그리고 왜 의사들이 그리 까칠한지 공감 가는 부분이 있다. 의사와 면담을 해보면 보통 좋지 않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말투 때문이다. 권력에 휘둘리는것처럼 느껴진다.  그 부분을 조금은 공감할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이국종 교수 조차 자기를 노가다라고 표현한다. 돈은 많이 받을지 몰라도 격무의 연속이다. 사람이 일단 잠을 자지 못하면 예민해질 수 밖에 없고 체력에 한계에 부딪히면 나 위주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환자를 성심성의껏 돌봐야겠다는 결심을 하더라고 시간이 지나면 감정 노동을 할 수가 없음을 느낄 것이고 또한 감정이 무뎌져 갈 것이다.

환자와 환자 가족 입장에서는 고통과 죽음이 비일상적, 특별한 일이라면 의사들에게 죽음은 흔한일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서는  일상적인 일로 점점 무뎌져 갈 것이고 기계적으로 처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돌봐야 하는 환자는 많고 시간은 없고 에너지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까칠하고 포악해져 간다.

환자들이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선 병원 시스템이나 의사와 간호사들이 돌보는 환자수가 줄거나 해야 될 것 같은데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선 문외한이라 알수가 없다.

하지만 읽다보면 글의 퀄리티가 후반부로 갈 수록 점점 떨어진다. 초반부의 밀도 있는 글들 이후 신변잡기적인 내용으로 흘러가며서 지루한 감정이 들었다. 에세이집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1,2장 반짝 괜찮은 글이 있고 그 다음엔 그냥 그저 그런 글들을 붙인다. 페이지는 채워야 겠고.. 뭐 그런 거지.

책속으로

p.7 슬픔으나 그 대상이 하나일때가 가장 슬프고, 정신적인 공황 또한 원인이 한 가지일 때가 가장 혼란스럽다. 지나치게 많은 죽음과 슬픔은 때로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게했다.

p.24 나는 어떠한 사람이 오든, 절대 비켜서는 안 되는 사람이므로 내 앞에 죽어가는 사람이 빨려들 듯 다가온다. 그리고 무한한 책무가 시작된다.

p.28 밤을 새워 100여 명의 환자를 견딘 나는, 이제 중환자실로 올라간 내 환자가 있었으므로 오프를 반납했다. 그녀를 살려내거나, 아니면 패배할 때까지는 집에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p.35 순간, 나는 입술을 깨물며 불행해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보다도 조금이라도 더 불행해지기로, 나는 굳게 마음 먹었다.

p.58 나는 죽음을 예감한 실혈 환자에게 강박적으로 최선의 노력을 해댄다. 그렇지 않으면 환자의 죽음을 선언하고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말을 할 때 의사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되므로. 의사가 되어, 최선을 다하지 못한 이에게 사망선고를 하는 일은 정말 최악이다. 그것만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p.68 ‘방금 벌어진 일련의 과정이 전부 최선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 사람에게 부끄러워진다.’ 나는 그런 확신이 들 때까지 망자의 얼굴을 바라보곤 했다. 하지만 의학에 있어 확신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확신이 들지라도 나와 대면했던 사람은 죽었으므로 그 결과를 내가 마주해야 했다.

p.107 누군가에게 자유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유란 하고 싶지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p.155 세상은 사라질 것이 뻔한 자에게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주변 사람들은 불쌍해할 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불편하고 낯선 동정, 측은해하는 눈빛과 혹여 일어날지 모를 배신을 견뎌야 한다.

p.315 생각해보면, 당신에게 의료계의 현실이나 타인의 불행은 그리 중요한게 아니었다. 글 속에서 당신의 못난 아들은 사체를 붙잡고 머리를 싸대며 늘 불행한 곳에서 눈을 떳다. 때로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며 항상 죽을 것 같은 충동에 휩싸이는, 당신에게는 그 글들이 그렇게만 읽혔을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 어두운 침대에서 당신은 그 자리를 당신 스스로 방관했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거다. ‘자식을 불행 속에 내팽겨쳤구나’.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당신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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